언제나 건강 2009년 8월 민의련 강령- 여기에 그 힘의 비밀이 – 1 키워드: 무차별 평등 의료
민의련의 사업소는 현재 1754개소, 7만명을 넘는 직원들이 전국에서 의료와 개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과 규모는 서로 달라도, 같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민의련강령>입니다.
1961년에 정해진 이후 반세기를 거쳐 온 강령의 버전업을 도모하고 계획중인 이번 기회에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민의련의 참모습을, 강령의 키워드로부터 따라가보고자 기획한 시리즈. 첫회는 <무차별 평등의 의료>로 교토에서 시작해봅니다.
무료저액 진료제도 – 교토의 ‘큐조진료소’
<무료저액 진료제도>는 저소득층이 의료기관에 지불해야 하는 본인부담을 의료기관이 부담하는 것으로, 환자의 부담을 면제 또는 감액해주는 제도입니다.
“돈이 없어서 의료기관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 생명의 무게가 돈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민의련의 옹고집을 상징하는 실천의 하나로서, 이 제도의 도입에 도전하는 사업소가 늘고 있습니다.
창구부담은 제로, 활용은 단연 최고
민의련 안에서 이 제도활용이 단연 최고인 것은 큐조진료소(교토 보건회). 환자들의 54.3%가 제도를 이용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2008년). 제도 자체는 오랫동안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사용하자고 결정한 것은 고령자의 의료비 본인부담이 ‘정액제’에서 ‘1할’ 로 개악되었을 때부터입니다.
이에 대해 도모토 요시지 사무장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 당초, 직원회의에서 재가 제기한 것은 오히려 반대의견이었습니다. 제도 활용은커녕, 경영을 압박하는 것으로 오히려 곤란하니 억제하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료소는 왜 있는 거냐? 하는 반론이 이어졌습니다. ‘치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분을 잘라버릴 건가? 생각을 바꿔라’는 사무직원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간호사한테서도 ‘아무개씨는 이 이상 부담은 무리,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아무개씨도 그렇고…’, 이 사람도 또 이 사람도 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환자분들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직원들의 강한 의견으로 방침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제도를 알리고,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작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진료소에는 병원처럼 상담실은 없습니다. 환자분의 상담은 병원 안에서 직종을 막론하고 가능하도록 하고, 구체적인 절차를 밟은 것은 사무직원이 담당합니다. 무료 저액제도의 이용자가 늘고, 한 권이었던 이용자의 관리수첩은 2권이 되었습니다.
환자분들의 생활상까지 알고 있기 때문에.
동 진료소는, 1953년에 교토시 중에서도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생활환경도 열악한 히가시큐조지역에 탄생했습니다. 현재도 생활보호자와, 노인이 노인을 개호하는 소위 ‘노로요양’, 독거노인세대, 재일외국인,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 등, 경제적 사회적으로 곤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환자분들의 생활상을 직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간호사도 사무직원도, “저 환자분 좀 신경이 쓰이니까 한번 집에 가서 어떠신지 보고 와”라고 말이 나오면, 됐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환자분들의 집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아는 직원까지 있다. 힘든 게 있으면 진료소에!라고 할 정도로, 지역에서 진료소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철저하게 환자분에게 집착하는 소장의 자세도 크게 작용하지요”라고 말하는 도모토 사무장.
소장은 ‘아먀센(야마모토 센지)’의 손자
소장은 야마모토 유지 (의사). 통칭 ‘야마센’(야마모토 센지)의 손자 분입니다.
야마모토 센지는 전쟁 전 국회에서 치안유지법에 반대한 유일한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익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사망.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그의 뜻을 이어 활동해나가자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산자 진료소>였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민의련의 뿌리입니다.
야마모토 소장은 큰 병원의 근무의를 거쳐, 민의련의 지역의료에 뛰어들었습니다.
“근무의 시절에, 큐조진료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대기실에서 많은 환자분들이 와글와글했지요. 직원을 놓고 시비를 거는 분도 계셨고, 큰 병원에서처럼 좀 풋내기라도 의사라도, 의사가 해주는 이야기를 고맙게 듣는 환자를 볼 수 없어서, 이런 상황을 좀더 진지하게 대처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역 분들은 한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믿고 따라줍니다. 입은 좀 험해도, 이렇게 정직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나 싶게 되지요”
소장은 서른 아홉 해에 돌아가신 조부의 얼굴은 물론 모릅니다만, “민의련에서 일해서 야마모토 센지의 뜻을 이어나가지 않겠는가”는 제안에 응했습니다. 전쟁 이전, 국민개보험도 없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은 사망진단서를 받을 때 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의 시대. 조부가 소망한 “무차별 평등의 의료”가 민의련 속에 숨쉬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근무의로서 병원을 그만두지 않으면 출세해서 잘 살수 있을 텐데… 하면서 그만두는 것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이 길을 택하고 의사로서의 자신의 생각이 관철되었다고 봅니다. 환자들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당찬 직원들과 함께 30년을 해왔으니까요.”
무차별 평등, ‘자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무료 저액진료 상담은, 직원에게 있어서도 지역을 더욱 잘 알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일이 줄어버린 아들의 생활비를 돕기 위해 75세가 넘어서 접시 닦는 일로 이른 아침부터 나가야 하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중년의 아들과의 두 식구 살림. 무연금인 어떤 환자분은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권해도 돈 걱정에 검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구의 복지사무소로부터 진료소를 소개받아 온 실업자도 있습니다.
상담의 중심에 서 있는 사무직원 나가노 호나미 씨는 “일하는 데 보람이 없단 말 했다가는 아마도 천벌을 받지 않을까요?” 한다.
진료소의 무료 저액 진료제도 때문에 초과되는 비용은 연간 천만엔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사무장은 웃는 얼굴로 “이 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한다. 의료비부담이 원인이 되어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없어졌습니다. 이런 검사나 투약을 하고 싶어도 환자부담이 되므로 그만두어야 하는 ‘의료의 위축’이 줄어들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존재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힘이 넘치는 거라구요..”
글, 사진/ 키노시타 나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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