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メールロゴ
  • Xロゴ
  • フェイスブックロゴ
  • 動画ロゴ
  • TikTokロゴ

ニュース・プレスリリース

시리즈 – 피폭 60년 옥쇄(玉碎)와 원폭의 섬

 
hangeul_genki_200508_01
 
hangeul_genki_200508_02
마츠다 고이치
hangeul_genki_200508_03
일본군이 만든 활주로. 지금도 미군이 연습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아래 삼각형 양각에 보이는 점이 원폭탑재지점. 앞의 해안이 니시하고이 해안 (제공 신문 <아카하타>)

테니안을 아십니까?

일본군이 만든 활주로로부터 원폭탑재기가

사철이 여름인 낙원 테니안. 그러나 이 섬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만 천 오백 명의 군인, 민간인이 전사한 <옥쇄>의 섬입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흩어진다는 뜻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국민이 천황을 위해 명예와 충절을 지키고자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는 미화의 단어). 그리고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 그것을 테니안 섬에서 부친을 잃은 마츠다 고이치(65) 씨에게서 듣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것은 알고 있어도, 원폭을 실은 B29 폭격기 <에노라 게이>와 <박스카>가 어디로부터 날라 왔는지는 별로 알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닌지요.

그 발진기지가 된 것이, 테니안 섬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행장은, 일본군이 만든 것입니다. 테니안 섬은 스페인, 독일이 영유하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로 되어 일본이 그 수임국으로서 약 30년간 통치. 일본인도 일만 명 이상 거주, 사탕수수 등을 재배했다고 합니다.

본토공습의 거점으로서

이 섬에 비행장건설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천명의 수인이 보내어진 것은 1940년 1월입니다.

불도저와 착암기도 없이, 오로지 인력으로 거목과 바위를 베고 갈라 1941년 11월까지 1년 11개월에 걸쳐 2500미터의 활주로를 만들었습니다. 완성직후의 12월 8일 미일개전.

미군은 당초부터, 일본본토공습의 거점으로서 사이판, 테니안, 괌의 점령을 겨냥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대본영(다이혼에이)은 이 작전을 알아채지 못하고 <적이 사이판에 상륙한다면 그거야 우리가 예상한 바다>(도죠 히데키 참모총장)라며 호언장담하고 있었습니다.

1944년 6월, 사이판은 사투 끝에 함락. 대본영은 아예 순순히 사이판 포기를 결정, 동시에 테니안도 그대로 내버려졌던 것입니다.

미군은 사이판에서 일본군의 맹반격을 받고 3천5백 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데여, 테니안 섬에서는 남측으로부터 침공하는 것처럼 보이고, 일본군의 주력을 남쪽으로 끌어들이고, 일전 비행장 가까이의 니시하고이 해안으로부터 북상했습니다. 1944년 7월 24일입니다.

반격한 3대군이 전멸. 내 아버지도 이때 전사하셨습니다. 그로부터 8월 3일까지의 11일 동안에 테니안 섬의 일본 육해군 약 8천명, 현지인 포함 민간인 약 3천5백명이 죽었습니다. 수천명이 절벽으로부터 몸을 던지거나, 아기마저 함께 자폭해 죽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옥쇄>니 뭐니 하는 미화하는 말로 형용할 것이 아닙니다

히로시마에 돌아가 피폭한 사람도

hangeul_genki_200508_04
테니안섬의 카로리나스 대지에 세운 <진혼불전의 비>. 1978년에 건립. 뒤쪽에 보이는 것이, 도민들이 쫓겨가 몸을 던진 카로리나스 갑곶

정글로 덮인 비행장을 찾아낸 것은 <동경대공습을 기록하는 모임>에서 동경의 시타마치, 일반 시가지를 불살라버린 B29가 대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조사하고 있던 이시카미 마사오 씨입니다. 1976년부터 30년간 매년, 유골수집과 조사를 계속해 왔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제일의 의무로 생각하는 발상이 있었다면, [절대국방권]이었던 사이판을 빼앗긴 시점에서 무조건 항복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마리아나 제도를 빼앗기면, 이곳을 기지로 한 본토공습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전쟁지도자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고 이시카미 씨는 말합니다.

공습은 1944년 12월부터 매일 같이 있었고, 3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게다가 원폭으로, 히로시마 20만명, 나가사키 10만 명의 사람들이, 일순간에 죽어갔습니다.

활주로건설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형무소로부터 234명의 수인이 와 있었습니다. 완성 후 귀국하여, 원폭으로 돌아가신 분도 계십니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가깝게 느꼈다

hangeul_genki_200508_05
원폭탑재지점 넘버원. 풀이 난 곳이 구멍으로, 그 안에 원폭 리틀보이를 넣어, 에노라 게이가 올라타 실었다.

제가 처음으로 테니안에 간 1991년. 뜻밖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테니안 현지에서 농업 등을 하고 계신 일본인과 교류하고 있는데, 그때 <<마츠다 하루오 대위의 가족을 찾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물어보니, 아버지의 부하였던 분으로부터 <<돌아가신 곳이 이 주변이니, 유골을 찾아주기 바란다>>고 부탁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기일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향년 38세. 아버지는 나가노의 농가 출신. 토지가 없고, 남자는 군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사진으로밖에 모르는 아버지이지만, 부하를 결코 때리지 않는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전후 테니안 시장이 된 고 필립 멘디오라 씨는, 일본인을 좋아했지만 <<유골수집하러 오는 것은 민간인뿐, 정부는 눈길을 주지도 않는다>>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지금 또 다시, 전쟁을 미화하는, 전쟁을 하는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옥쇄>와 <원폭>의 섬 테니안에서 있었던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 記事関連ワー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