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 피폭 60년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원고의 증언비디오를 만들어 지원 치바-원폭증인정집단소송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국가에 원폭증이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국에 있습니다. 일본피단협(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의 호소에 부응하여 치바현에서도 원폭증인정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이 벌어져, 치바 민의련도 지원에 나서고 있습니다. 재판의 승리를 향하여 여론을 구축해나가고자 실천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원폭이 인생을 `구렁텅이`로
“원폭으로 내 인생은 구렁텅이로 빠졌다.“고 말하는 다즈메 스미에 씨(67). 2회 원폭증 인정신청을 했으나 각하되었습니다. 치바의 집단소송에서, 38번째의 원고가 되는 것을 결의. 치바 겐세이 클리닉(치바시)에서 2월 5일, 피폭체험의 증언, 비디오촬영이 이루어졌습니다. 증언은 소송을 지원하는 치바회에 의해서 다른 원고의 증언 등과 함께 편집되어, 데모 테이프로 보급, 활용될 예정입니다.
다른 피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담담당(소셜 워커)인 마쓰모토 와카바 씨(30, 치바겐세이병원)와 나카무라 구와코 씨(29, 후나바시 니와 병원)가 청취인이 되어 질문합니다. 다즈메 씨는 질문에 대답하며,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도 똑똑히 정면을 향해, 고통스런 체험과 에어질 듯한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다즈메 씨는 원폭이 투하되었을 당시 일곱 살. 폭발중심부로부터 1.7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집에 있었으며, 허리와 다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가족은 피난했지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여동생을 찾아 오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씀에 다즈메 씨는 따랐습니다. 그러나 수십 시간을 걸쳐 간신히 동생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목격한 것은, 나무수레에 눕혀져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이 커서, 지금도 다즈메 씨 머릿속에는, 그때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고 합니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가족은 서로 다른 집에 맡겨졌고, 다즈메 씨는 아홉 살 때부터 일터에 나갔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보통 회사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아르바이트만 해왔다. 막노동이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의 일들 뿐이었다.“ 어쨌든 살아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 후, 일해나가면서 치바현으로 이동. 결혼했으나, 최초에 태어난 아이는 11개월 정도에 죽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경우도 “애들이 연중 기침을 하고, 딸아이는 루마치스로 모두 체력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심장정지 3회, 뇌경색 2회
다즈메 씨는 20대부터 치아의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17 ~ 8년 전부터 지금까지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정지를 3회 경험. “보통 사람이 어디 3회나 심장이 멈춥니까?“. 원폭증이 아니고 뭐냐며, 호소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갑니다. 뇌경색도 2회 경험. 현재 신장은 좌우 양쪽 모두 기능장애를 일으켜 “건강한 사람의 3분의 1밖에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의사에게 듣고 있습니다.
“금방 피로감을 느낍니다. 누구보다도 빨리 감기에 걸리고. 감기에 걸리면 바로 40도의 열이 나고. 고열로 경련도 일어납니다“ 후나바시 니와병원에 몇 번이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추간판장애에 의한 등의 통증도 대단히 심하고, 수면제가 없으면 밤에도 잠이 들 수 없는 상태.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도, 죽기 직전까지 `등이 아프다, 아파`라고 말씀하셨다“며, 등의 통증은 먼저 간 가족에게도, 살아 있는 형제에게도 공통되는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일본이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내 자신도 이런 몸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양친과 형제도 살아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런 기분은 원폭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라며 분노했습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삶은 변해 있을 거 아니겠는가는 말씀인가요?“라는 질문에 “그렇습니다“라고 확실히 대답했습니다.
원폭소송응원단을 만들어
치바현 내에는, 원폭수첩을 지닌 사람들이 3460명(2003년말 현재) 있습니다. 피폭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치바에 이 정도로 많은 피폭자가 있는 배경에는 전쟁중 사쿠라시에 있었던 일본육군의 사쿠라연대의 존재가 있습니다. 사쿠라연대는 하라무라연습장( 히가시히로시마 시에 있는 현재의 육상자위대 하라무라연습장)에서 연습중에 원폭이 떨어져, 명령에 의해 히로시마 시에 들어가 구제활동을 하였습니다. 군의 명령으로 피폭자가 된 것입니다. 치바 민의련도 사쿠라연대의 시내진입피폭자의 현지조사에 참가하여 조사하였습니다.
치바 겐세이병원 건강한 벗의 모임에서도 <원폭소송응원단>을 만들어, 재판을 방청. 직원과 함께 마쿠하리진료소의 현관 앞이나, 역전에서 재판 소원의 공정한 심사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을 호소하는 등의 활동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다섯 살 때 동경대공습을 맞아 아버지의 등에 업혀 전화 속을 도망다녀야 했던 스즈키 하루오 씨는 “이런 재판은 남의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다“며 각오를 말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다즈메 씨의 이야기를 들은 나카무라 씨는 “어떤 사람들이 싸우고 있으며,(이에 대해) 국가(정부)는 뭐라고 하고 있는지, 이 재판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것에는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잘못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마쓰모토 씨는 피폭자 건강진단 등에 관여하면서, “전쟁이라는 것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습니다. 교육기본법과 헌법의 `개정`, 이라크에 자위대 파견 등의 움직임에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두렵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 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실천활동을 넓혀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글 다타 시게마사 기자
사진 사카이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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