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ニュース・プレスリリース

미나마타병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른 국가와 기업의 책임

글 야부키 노리토 (르포라이터)
사진 고미 아키노리

우작년 10월 15일의 미나마타병 간사이 최고재판 판결은, 국가와 현의 책임을 인정하고, 행정으로부터 기각된 사람의 일부를 <메틸수은중독>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금 인정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구마모토와 가고시마에서 속출하고 있습니다.

1996년의 화해로 1만 명을 넘는 피해자가 구제되었습니다만, 포기하고 있던 환자도 많았습니다. 피해자들의 진정한 구제를 요구하며, 지금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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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이 바다에서 헤엄치고, 생선을 먹어왔다. 이번에야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사키 씨

미나마타의 시가지로부터 자동차로 약 30분. 시라누이해를 왼쪽으로 하고 구불구불한 해안선 도로를 달려 도착한 어촌에 사사키 미츠오 씨(65)의 집이 있습니다. 이 지역 어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사키 씨는, 어릴 적부터 매일처럼 바다에서 헤엄치고, `생선을 먹고` 자랐습니다.

미나마타병은, 사사키 씨의 집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제1차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한지 얼마 안 되어 쇼와 40년대(1975년대) 후반, 양친, 형, 여동생이 연이어 인정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사키 씨보다 다섯 살 아래인 여동생 쓰타코 씨는 어릴 적부터 몸을 일으키기 힘든 상태로, 74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발굴검진에 의해서 발견되어, 인정된 환자였습니다.

얼핏 보면 건강한 사사키 씨도, 찻잔을 떨어뜨리고, 걷다가 넘어질 뻔하고, 손발에 힘을 줄 수 없는 등의 증상이 있습니다. 손발의 떨림은 벌써 25살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 전에 신청했을 때에는 “23세 때부터 약 10년 간 오사카에 전출해 있었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병이) 인정된 부모 형제와 같은 것을 먹어온 걸요.“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사사키 씨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은, 작년 10월의 미나마타병 간사이소송 최고재판 판결이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자신도 인정될 수 있지 않을까. 사사키 씨는 희망을 품고, 미나마타 협립병원의 다카오카 스스무 의사(신경내과 재활센터 협립클리닉 소장)을 찾아갔습니다.

 

신청희망자 급증하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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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찰하고 있는 다카오카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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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의사 (학습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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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이 모인 `미나마타병` 학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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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쏘 미나마타 공장의 백간 폐수구. 메틸수은은 함유되어 있지 않으나, 지금도 오염된 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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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치료 중인 사람들 (미나마타 협립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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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떨리는 아라카와 씨

작년 12월, 미나마타에서 백 명 가까이가 모여, NPO미나마타 주최로 <미나마타병>의 학습회가 열렸습니다. 단상에 선 것은, 30년 이전부터 구마모토 민의련에서 미나마타병 환자의 진찰과 구제로 분주한 후지노 타다시, 사카이 야에코, 두 의사. 그리고 지금도 날마다, 환자와 접하고 있는 다카오카 의사입니다.

이 모임에서 다카오카 의사는, 11월 중에 진단한 미나마타병 환자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최고재판소(대법원) 판결 이후, 구마모토와 가고시마에서는 2개월 동안에 3백 명 가까운 신청자가 급증. 다카오카 의사 자신도, 20수명의 진단서를 썼습니다. “11월 중에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정밀검사해서 진단서를 쓴 분들 중에, 허가를 얻은 11명에 대한 배경과 증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보고된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장애=전원에게 인정됨> <구심성 시야협착= 있음 5명, 없음 4명, 불명 2명> <상지실조=있음 6명, 없음 5명> <하지실조= 있음 8명, 의심 1명, 없음 2명>… 많은 사람들이 미나마타병에 특징적인 증상을 합쳐서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준에서 보면, 적어도 5, 6명은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제되어야 할 환자에게 손길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도 심각하게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기각된 사사키 씨도, 다카오카 의사의 진단으로는 “사지말초에 강한 전신성 감각장애로, 운동실조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많은 환자들에게 있어서 “미나마타병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후쿠오카 최고재판이 진단기준을 확정

1956년에 어린 자매의 발병으로부터 `공식확인`된 미나마타병은, 60년대에 걸쳐 급성극증환자나 태아성환자 등, 비참한 피해자를 내는 미증유의 공해사건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원인이 <유기수은>이라고 특정된 후도, 가해기업인 치쏘는 폐수를 계속 흘려보내고, 국가에서도 효과적인 수단을 택하지 않고, 피해는 시라누이 해안 수만 명의 주민에 이른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피해확대 속에서, 국가는 “몇 개의 증상의 조합이 없으면 미나마타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엄격한 인정기준을 77년에 책정하고, 환자들을 쳐내 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피해자들은, 구마모토만이 아니라, 도쿄, 교토, 오사카 등에서 제소. 85년의 미나마타병 제 2차소송 후쿠오카 최고재판 판결은 “오염어을 다식한 사실과, 사지말초성 감각장애가 있으면 미나마타병“이라고 하는 병상(진단기준)을 채용하여 확정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중의 정부해결책에서도 기준이 되어, 1만 명을 넘는 미나마타병환자를 구제한 것입니다.

이 병의 증상을 확립한 것이, 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뿌리를 내려, 치쏘 미나마타공장의 문 앞에 진료소를 차려서 1만 명을 넘는 환자를 진료해온 후지노 의사를 선두로 한, 민의련의 의료활동이었습니다. 미나마타병 소송변호단 사무국장의 사카이 스구루 변호사는, 간사이 소송판결을 치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미나마타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은, 이미 후쿠오카 대법원에서 나오고 확정된 것입니다. 이번 간사이소송 최고법원판결도 이 범위 내의 것입니다. 다만, 이것에 의해서 인정신청자가 급증하고 있는 사태를 생각하면, 국가는 인정기준을 재인식하고, 특별입법도 시야에 넣은 발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 구제를 향하여

미나마타병의 피해자로 결성된 전국련(당시)은 “모든 환자의 생존시 구제를“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96년 국가와의 화해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1만 천명 이상의 환자가 구제되었습니다. 그 중 2천5백 명 이상이 벌써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화해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손이 닫지 않는 피해자가 있다“는 것은 전국련과 화해는 했으나 “미나마타병 인정기준을 일관해 바꾸지 않았던 국가의 책임“이 지금 다시금 선명해진 것입니다.

아라카와 하야오 씨(76)는 미나마타병의 원인 기업인 치쏘에서 40년 간 일했습니다. 재직중부터 손발이 떨리고, 감각장애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몇십 년 간 인정신청 방법을 몰라, 협립병원에 와서 처음으로 배워, 작년 6월이 되어서야 비로서 신청했습니다.

“치쏘기업이 나빠요. 수은이 흘러내린다고요. 국가도 현도, 기업우선인 거죠.“

간사이소송 최고재판 판결 후에, 인정신청을 요구하며 미나마타 협립병원에서 신청에 필요한 진단서를 발행하기 위한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은, 현재 이미 백 명 정도 되었습니다. 구제되어야만 할 피해자는, 계속해서 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현은 작년 11월 ▶ 하치요해연안 약 47만명(가고시마 포함)의 건강조사를 실시, ▶후쿠오카 최고법원에서 확정한 인정기준을 기반으로 약 3만4천명(가고시마 포함)의 요양비를 지급하는 등을 골자로 한 대책을 국가와 함께 실시하는 안을 냈으나, 국가는 아직도 명확한 방침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당면한 구마모토 민의련은 전일본 민의련과 협력하여 향후에도 지역으로 나아가서 검진활동 등의 체제강화를 지향해 나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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